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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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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으로서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분명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라서 인종에 의한 차이는 거의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은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받은 사람도 있고 기초 분야를 포함해서 과학 기술 분야에서 영향력을 가졌지만 한국은 두 나라에 비해 상당히 뒤쳐진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노벨 문학상이나 필즈상 수상자가 최근에 나오긴 했으나, 여전히 중국과 일본과는 격차가 있다. 나는 이것은 단순히 두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력(자본력을 포함하여)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혁신은 결국 특정한 (이른바 천재라 불리는) 사람이 해내는 것이지 단순히 돈을 써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어떤 천재 덕분에 1970년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따라서 나는 이것의 핵심 원인이 한국이 가진 특정 문화 때문일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최근에 그 문화가 바로 한국의 이른바 ‘빨리 빨리’ 문화라고 결론내렸다.
‘빨리 빨리’ 문화가 가진 강점은 분명히 있다. 한국 전쟁 이후 최빈국 수준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이 현재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그 ‘빨리 빨리’ 문화의 힘 덕분이었다고 보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 한국의 여러 분야에서 강점을 발휘한다. 선도하는 나라의 발전을 최대한 빠르게 따라갈 수 있는 fast follower 전략이 성공한 것은 분명 그 문화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의 많은 한국인들이 느끼다 시피 현재 한국은 더는 앞선 나라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는 추가적인 발전이 어려운 상태이다. 많은 부분에서 이미 한국이 선도적인 영역에 들어섰기 때문에 더는 다른 그룹을 쫓아가기 보다는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인류가 해결해 낸 문제를 빠르게 배워서 활용하는 것은 ’빨리 빨리‘ 문화가 뒷받쳐주는 fast follower 전략으로 가능했지만, 인류가 아직 해결 못한 문제를 해결해서 세상을 혁신하는 일 —ChatGPT에서 시작된 AI 혁신 같은— 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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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 문화의 가장 좋지 않은 점은 ’깊이 있는 사고’와 ‘창의적인 사고’를 저해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깊이 있는 사고는 깊이가 깊어질 수록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거꾸로, 빠르게 답을 내려고 할 수록 얕은 수준의 사고 밖에 할 수 없다. 또한 ‘빨리 빨리’는 빠른 시간 동안 최적화된 답을 내야 필요로 하므로 다양한 가능성과 조합을 자유롭게 탐색하는 ‘창의적인 사고’를 저해할 수 밖에 없다.
‘빨리 빨리’ 문화에서 오랜 시간 동안 답을 못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로 보일 수 있다보니 한국인들은 ’깊이 있게 사고’를 통해 문제에 대한 답을 탐색 하기 보다 ‘최대한 많은 것을 미리 암기’해서 빠르게 문제에 답을 내려는 형태를 띄게 된다. 당연히 ‘미리 암기’가 가능한 것은 이미 해법이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해법이 알려진 문제를 다루는데는 효율적이지만, 해법이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깊이 있는 사고’와 ‘창의적인 사고’에 대한 훈련을 부족하게 한다.
나는 바로 이것 때문에 한국이 ’기초 과학‘ 분야에 대한 기여나 ’난제‘를 해결하는 업적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며칠 내에 혹은 1-2년 정도의 시간을 써서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는 사실 그다지 가치가 있는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운이 좋은게 아닌 이상)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이 그저 시도하지 않은 것일 뿐에 가깝다. 밀레니얼 문제와 같이 인류에게 정말로 가치가 높은 문제는 수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시도했음에도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난제이고, 이런 난제는 결코 1-2년 정도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최소 10년 이상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축적되어야 한다.
실제로 인류가 해결하고 했던 지능을 가진 기계인 ChatGPT는 OpenAI에서 만들어지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고(그 사이 GPT-1, 2, 3 포함), OpenAI의 창업 멤버들이 그 전에 이미 딥러닝 분야에서 십수년 이상 업적을 쌓았던 사람들임을 생각해 보면,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해당 분야에 대해 십수년 이상의 깊은 수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 하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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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 문화의 또 다른 문제는 무언가를 ’확실히‘ 하는 것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깊이 있는 사고‘와 유사하게 상식적으로 무언가를 확실히 하려면 할수록 시간이 더 소요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빨리 빨리‘ 문화는 필연적으로 ’대충 대충‘을 장려하고 ’확실히‘ 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로 수학 공부를 들 수 있는데, 수학은 특성상 앞선 단계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면 뒷 단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진도를 위해 겉핥기 식으로 수학 공부를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본인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 이후의 내용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 해당 부분을 공부한 시간만 날리게 된다.
나의 예로 나는 ‘선형대수학’을 3번쯤 반복해서 공부했는데, 처음 1-2번은 이른바 한국인의 방식 대로 선형대수학의 각종 계산 방법(이른바 각종 공식) 위주로 짧은 기간 동안 암기하는 식으로 공부했었는데, 그렇게 배운 상태에서는 어떤 수학을 기반으로 한 AI 논문을 볼 때 한계를 느끼게 됐고, 결국 3번째로 <프리드버그 선형대수학>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3번째 공부에서는 증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문제를 풀면서 진도를 나가고 있는데, 이런 방식이 아무래도 이전보다 시간은 훨씬 더 걸리게 되지만 —어림잡아 3배 이상— 이전보다 선형대수학(과 수학의 체계)을 훨씬 깊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수식으로 가득한 AI 논문을 이해하는데도 훨씬 수월한 상태가 되었다.
만일 처음부터 지금처럼 각 단계를 확실히 이해하면서 넘어가는 식으로 공부 했다면, 앞선 1, 2번의 공부가 필요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시간을 더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무언가 제대로 못 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결국 제대로 못 했던 단계로 다시 돌아가서(이것이 늦어질 수록 비용은 커진다) 다시 반복하는 과정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시간을 더 잡아먹는다.
내가 현 시점 한국인(넓게 보아 한국계를 포함하여) 중에 최고의 천재가 허준이 교수라고 생각하는데, 허준이 교수의 어릴 적 일화에서, 수학 문제의 답을 보았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나고 그 이후에는 문제 하나를 풀 때 며칠이 걸리더라도 답을 찾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런 접근 방법이 장기적으로 더 빠르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허준이 교수는 수학을 대학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해서 40살에 필즈상을 탔으므로, 공부하던 시절에는 이미 어릴 때부터 수학을 했던 동료들보다 느렸지만, 결과적으로 더 빨랐다.
20세기 최고 수학자라 불리는 그로센틱도 공부할 때는 당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에 비해 느렸지만, 모든 개념을 차근차근 확실히 정복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했던 결과, 그로센틱은 수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수학 분야를 개척해 낼 수 있었지만, 당시 그와 같이 공부했던 진도가 더 빨랐던 동료 중에는 그에 견줄 수 있는 업적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
깊이 있는 사고에서와 유사하게, 인류가 해결 못한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일단 기존에 알려진 개념을 확실히 이해해서 해당 개념에 대해 이른바 핸들링이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 해당 개념의 한계와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을 확장하거나 혁신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첨단 연구는 다 기존에 밝혀진 것들을 참조하여 발전하는 것이지 기존의 지식과 무관하고 독립적인 개념이 나타나는 일은 없다. 이것이 논문에 수많은 레퍼런스가 달리는 이유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뉴턴 역학을 발전시킨 것이지 뉴턴 역학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겉핥기 수준에서 해당 분야를 확장하거나 혁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빨리 빨리‘ 문화는 깊이 있는 사고(추상화)를 방해했던 것과 유사하게 무언가를 확실히하는 것을 방해하여 혁신을 저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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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빨리 빨리’ 문화의 힘은 실로 강력했다. 실제로 단기적인 상황에서는 속도가 정확도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빨리 빨리‘ 전략이 ’느려도 확실하게‘하는 것보다 유효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는 속도보다 정확도가 중요하고 ’느려도 확실하게‘하는 것이 ’빨리 빨리‘를 압도한다.
현시점 한국은 더는 ’fast follower’ 전략이 통하지 않는 상태이고 추가 성장을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그 새로운 동력이 법이나 자본 보다는 문화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기존의 ‘빨리 빨리’ 문화를 버리고 ‘느려도 확실하게’하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느려도 확실하게’는 절대적으로 느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빠르게‘ 보다 ‘확실하게’ 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을 의미하며, ‘빠르게’보다 상대적으로 느릴 뿐, ‘확실하게’가 정착되면 이후에 속도는 자연스럽게 오를 수 있다. 무엇이든 숙달되면 속도는 저절로 오르기 때문이다. ‘느려도 확실하게’의 진정한 의미는 ‘빠르게’보다 ‘확실하게’를 더 우선한다는 것에 있다. 또한 ‘느려도 확실하게’는 ‘빨리 빨리’보다 단기적으로는 느릴지라도 장기적으로 더 빠르다.